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베를린의 정복자 === 나치 정권의 탄생과 함께 괴벨스는 '''베를린의 정복자'''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높으신 분들이 보기엔 천박하게 딴따라질이나 하고 [[SA|주정뱅이 난봉꾼]]들과 어울리던 자였기에 내각에 참여하는 건 그들의 거센 반대로 무산되었다. 괴벨스는 용감하게도 힌덴부르크를 하도 욕하고 다녀서 '''본의 아니게''' 정권 탄생을 늦춘 공이 있었다. 결국 새로운 정권에서 괴벨스가 언제쯤 공식 직위를 가지고 활약할 수 있을지 그 여부는 불투명해 보였다. 1월 30일에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하자마자 공화국 체제를 합법적이며 최종적으로 '''절멸'''하기 위한 [[수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새로운 총선거가 벌어졌고 물론 이 '''마지막 선거'''에서도 괴벨스의 활약이 이어진다. 현 정부에서 각료도 아니고 직책도 없는 괴벨스가 제멋대로 선거일인 3월 4일을 '''민족 각성의 날'''로 선포한 가운데, 때마침 2월 27일에 마리뉘스 판데르뤼버라는 정신병자의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1960년대까지는 나치당에 유리한 사건이어서 당시 공산당 발표 등을 고려한 조작설이나 나치의 셀프 방화설이 다수였지만, 현재의 연구에선 당시 사건 기록과 재판 기록을 참고로 판단하여 개인의 단독 방화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외신까지 참여한 언론이 지켜본 법정에서 판데트뤼버는 범행 동기가 '노동자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라 주장했다. 함께 기소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등의 [[불가리아]] 출신 공산주의자 4명은 아직 나치화가 덜 진행된 독일 사법부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물론 히틀러는 판데르뤼버 혼자 유죄라는 재판 결과를 듣고 격노 크리...] 이 사건 직후 '공산 혁명이 임박했다'는 구실로 [[괴링]]이 프로이센 경찰을 동원해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기 시작했고 정부에선 별다른 조사 없이 '볼셰비즘이 저지른 역사상 가장 극악한 테러'라는 발표로 힘을 실어준 데다가 히틀러와 대통령 힌덴부르크를 한 배에 탄 것처럼 같이 묶어서 선거 운동까지 했기 때문에 선거는 순조로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